2014년 7월 27일 일요일

자기 주도적인 삶과 행복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비롯되고, 오늘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의 나'를 규정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좋든 싫든, 과거라는 원인이 현재라는 결과를 규정하고, 현재라는 원인이 미래라는 결과를 결정짓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컨텍스트를 정의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컨텍스트 안에서 일관성 있게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을 정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주도적인 삶은 그 컨텍스트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 대로 정의하고 그 컨텍스트에 부합하는 형태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준다?
실제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더 집착하는 사회를 살아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컨텍스트 보다는 바로 지금, 현재라는 결과에 더 집착한다. 성공의 개념이 보다 물질화 되고, 물질적 토대 위의 성공이 행복과 동일시 되고 있다.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저질러지는 온갖 탈법, 불법은 결과가 좋으면 그럴 수 있는 일로 불문에 붙여진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상식이 되고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개인 재산을 축적하거나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치인으로서 존경할 수 있을까. 어느 회사의 사장이나 임원이 여러가지 편법으로 탈세와 반칙을 일삼고 아랫사람들을 착취하면서 그 결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해도 괜찮을까. 주어진 권한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 받아왔던,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시 여겨왔던 상식들이다. 지금은 그 상식들이 깨지고 있다.

우리는 반칙을 하지 않으면 승자가 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종종 TV를 통해 방영되는 청문회를 통해 소위 사회적으로 많은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을 그들의 위장전입, 업다운 계약서, 탈세, 병역 기피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민낯을 보게된다.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이 곧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바이블인 셈이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반칙을 사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어느 정도 용인되는 세상이다. 어느 회사의 중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낌없는 존경과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국회의원으로서 사업가로서 그들이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들과 끈을 대기를 원하고, 혹시나 그들과의 인연이 나중에 어떤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끈을 가진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판사, 변호사, 의사가 되라 한다. 우선은 먹고 살 걱정없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는 사회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몇몇 직업군들이 생겨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정의롭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종종 목도한다. 우리는 그들의 무소불위 권력을 비판하고 부패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자식들은 그러한 직업을 가지도록 원하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직업이 왜 좋은 직업인지를 알려주고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보다는, 우선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오르고 볼 일이라는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식 만큼은 사회적 강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누구나 관심 받고 싶어하고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을 안고 산다. 좋은 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그리고 누가 봐도 크고 번드르르한 회사에 다니는 것. 이러한 욕망들이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가 바라봐 주고 알아줘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 부터 반응을 얻고 존경 받음으로써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준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여지껏 우리는 그래왔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의 의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질문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 당위성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컨텍스트에 부합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일 때 그 결과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일을 추진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요즘 ICT분야에서는 젊은 세대의 창업 열기가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정부의 창업지원센터를 통한 지원은 차치하고라도 민간차원의 창업생태계도 활발하게 구축되고 있다. 프라이머, 패스트트랙아시아, 케이스타트업과 같은 엑셀러레이터와 초기 사업에 투자하는 본엔젤스나 케이큐브벤쳐스와 같은 VC가 생겨나고, Series  B이상에 투자하는 무수히 많은 VC 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스타트업에게 허브역할을 제공해 주는 디캠프, 마루180, 스타트업얼라이언스등도 빼놓을 수 없다(1 page로 보는 한국의 창업생태계 참조).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갓 졸업한 젊은 세대부터 어느 정도 직장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 맞는 사람끼리 의기투합하여 창업에 도전하고 있다. 사오정이 일반화되어 있는 ICT분야에서는 사십대를 훌쩍 넘긴 많은 직장인들도 어렴풋하게 나마 한번쯤은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창업 물결은 애플이 바꾸어 놓은 ICT 산업생태계의 변화와 7%를 훌쩍 넘는 높은 청년실업률(통계청, 2013)이라는 경제상황이 맞물리면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실리콘 밸리에서 들려오는 몇몇 스타트업의 성공 스토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들의 보다 도전적인 목표를 향한 질주에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으나 어떤 면에선 그들에겐,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이유야 어떻든, 도전하고 고생한 만큼의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금 오래된 자료긴 하지만, 2012년 2월 기준으로 스마트 컨텐츠 개발업체현황을 보면,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이 전체의 49.5%이고, 1인당 연간 매출액이 2000만원정도에 불과하다(모바일 컨텐츠 이야기 참조). 2014년인 지금도 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창업을 하지만 사실 그들 앞에는 짚을 지고 불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은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창업에 도전하는 이의 동기가 오로지 실리콘 밸리의 성공한 사람들 처럼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거나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떠밀려 아무런 비전 없이 선택했던 것이라면, 사업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들은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게 될 것이다. 사업이 어느 정도 순항을 한다 하더라도,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서서히 많은 돈을 만지게 됨에 따라 점점 탐욕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미국 월 스트리트의 전 해지펀드 트레이더인 Sam Polk가 NYT에 기고한 "돈 중독"에 관한 경험담). 그 과정에서 그들은 탈세와 반칙을 일삼는 또 한명의 악덕 기업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각각 예일대와 스와쓰모어 컬리지(Swarthmore Colleage)에서 조직 행동이론과 심리학을 연구중인 Amy Wrensniewski와 Barry Schwartz는 미국 West Point의 군사학교 사관생도를 대상으로 한 내적 동기(internal motive)와 외적 동기(instrumental motive)에 대한 실험을 통해, 내적 동기를 더 많이 가질 수록 성취도가 높고 조직에 더 오래 복무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내적 동기란 행위의 본질과 관련된 동기를 의미하고 외적 동기란 그 행위의 결과로 인해 얻어지는 부산물 즉,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 같은 동기를 의미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강한 내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위 또는 선택에 대한 강한 내적 동기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선택은 어디 까지나 바로 "나"에 의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른 선택이어야 한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을 소유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러한 소유의 동기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거나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어떤 외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다. 판사, 변호사, 의사가 되는 것이 사회/정치/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법 앞에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 실현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하기 위한 내적 동기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경쟁사회에서 안정적인 고지를 우선 점령하고 남 부럽지 않게 살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다.


자기 주도적인 삶과 행복
요리책을 달달 외운다고 요리사가 될 수 없듯이, 남을 웃기는 101가지 방법과 같은 책만 읽어가지고는 개그맨이 될 수 없듯이, 행복에도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우선은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망, 나보다 잘 나가는 옆사람에 대한 질투, 비교하는 버릇.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남들 보다 더 잘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 놓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 진다. 미국 기업협회 의장인 C. Brooks는 NYT기고를 통해 인간의 불행(unhappiness)은 물질적인 것을 놓지 못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해야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언제 보람을 느끼는지, 언제 분노를 느끼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 지, 개인적/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 지등과 같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나'를 이해하는 과정은, 어쩌면 생각보다 긴 여정일 수 있다. 인생을 살아 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낯선 나'와 마주칠 때가 많다.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어찌됐든 그 조차도 나의 모습이다. 기나긴 여정에서 가급적 많은 직/간접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모습의 나를 많이 만나보는 것도,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하다.

마지막으로는 비전을 가지는 것이다. 비전을 가진다는 것은 나의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나'의 존재가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유의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고 아직 나이가 젊다면, 일단 뭐든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직장인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편이 닿는 대로 첫 직장을 선택하고, 일단 취직이 되면 나름대로 적응하며 흥미를 찾아간다고 한다. 무엇이 되었든 적응하며 흥미를 찾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공적인 삶이라 말하고 싶다.


의 성공과 행복은 누가 대신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성공과 행복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당신은 결코 당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학에서 부모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고,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구입한 외제차에 주변사람들이 열광하고, 당신이 그로 인해 희열을 느끼고 만족해 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주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성공한 직장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내미는 명함을 받기 위해 달려드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낀 다면 그 역시 당신의 행복은 아니다. 행복이라고 느낀 그 모든 감정이 사실은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당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부터 흘러나와 온 몸에 베어들고 마침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흔히들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들의 시선과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내가 맡은 그 배역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로인해 지금 현재 즐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어진 삶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낳고 대체로 긍정적 마인드는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다음에 책을 읽는 동안 다가왔던 몇 가지 구절들을 추려서 정리하였다.
  •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p24
  •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p33
  •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p34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p37
  •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삶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역이 옳다.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p47.
  •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p51
  • 상처받지 않은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p56
  •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이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다. 이 셋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위대한 세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p61
  •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를 가두어 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p63
  •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p83 
  •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내 스스로를 느낄 수 있는 행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p90
  •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있는 동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p104
  •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p139
  • 무엇인든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주는 기쁨과 의미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146
  • 만약 직업으로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p166
  •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 게 없고 최악이 된다. p171
  •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74
  •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걷했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p195
  • 부부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으며 성장기의 공통적인 경험도 없다. 헤어지면 바로 남이 된다. 부부 사이의 책임의식과 유대감은 사랑 위에서만 튼튼하게 유지된다. 사랑이 없어지면 조만간 책임감도 약해진다. p209
  • 무엇이든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쓰는 일은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다. 배움과 깨달음이 따라온다. p237
  •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p275
  •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름을 남긴다는 것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 행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든 그 사람의 마음이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p329

Red M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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