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3일 화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1)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이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정의한 48가지 감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니, 어쩌면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을 다양한 감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그동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만 집착해 오던 나의 감성을 깨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금 현재도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의 감정 상태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더불어 조금은 더 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과 이성의 존재는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지배하고 지배당해야 하는 관계가 아닌, 그 자체로서 오랫동안 진화된 인류의 자산이고 그 둘이 서로 간의 균형점을 찾을 때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만큼은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을 받은 학생의 입장에서 작가가 언급한 각각의 감정을 나의 수준과 눈높이에서 다시 리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없으시길. 

첫번째 감정에서 열두번째 감정까지:

1. 비루함: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비하하는 감정.
당신은 전신을 비추는 오목한 거울 앞에 서 본적이 있는가. 오목한 거울앞에 서면 누구나 왜소하게 찌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비루함은 그렇게 오목한 거울이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이 실제의 모습이라고 믿어 버리는 것과 같다. 과거에 많은 실패를 경험하거나 성장과정에서 많은 억눌림을 당하며 자란 사람들. 그것을 올바르게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반복된 슬픔이 고착되어 자신을 비추는 오목거울이 된다. 비루함의 감정에 둘러싸여있는 사람은 무슨 일에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그에 따른 성취감도 낮기 마련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인의 존재가 본인에게 뿐 아니라 주변에게 까지 얼마나 유의미한 존재인지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한 번에 하나씩 작은 성취를 이루어 가는 연습을 통해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간섭이 아닌 관심이 필요하다. 

2. 자긍심: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감정.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타인의 신뢰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타인의 신뢰는 다시금 우리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자긍심으로 나와 타인사이의 긍정의 에너지가 상호작용하여 관계의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자긍심을 가지는 사람은 비루함을 느끼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가진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거울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그 거울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빚어지긴 하지만 꼭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거울은 각자의 마인드 콘트롤과 같은 훈련을 통해서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거울을 빚어내는가 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관한 개인적 역량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다만, 성장과정에서 누군가가 조금 도와준다면 더욱 수월해질 수 있지 않을까. 비루함과 자긍심은 마음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니, 결국은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지 않을까.

3. 경탄: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감정.
경탄의 대상은 그 자체로 신비함이기도 하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눈이 부셔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끊임없이 가까이 다가가고픈 존재.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인간관계에서 경탄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의 노력은 경탄의 대상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스스로를 갈고 닦아 완성된 인간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노력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는 그 누군가를 늘 갈구한다. 그러한 자극을 통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어 자극을 교환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스승과 제자로서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또 있을까.

4. 경쟁심: 동일한 무엇에 대한 서로 다른 사람의 욕망.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늘 타인을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경쟁은 희소한 가치를 가운데 놓고 이루어진다. 아무곳에나 널려있는 그 무엇이라면, 무엇하러 경쟁을 하겠는가. 희소가치가 높을수록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그 희소한 가치를 쟁취했을 때 함께 얻게되는 명성. 경쟁심의 이면에는 타인으로부터 주목받음으로서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그러한 주목받음(다른 말로 '인기')이 돈으로 환산되는, 아주 재미진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종종 경쟁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안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쟁심은 서로 다른 사람이 상호작용 하는 또 하나의 채널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뭔가를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나은 상대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어느새 동지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경쟁을 한다는 것은 동일한 목표를 두고 동일한 시공을 공유하는 것이다. 마라톤에 페이스 메이커가 있듯, 나혼자 달리는 것 보다 경쟁자와 함께 달리는 것이 목표달성에 더욱 유리하다. 인간관계에서 경쟁심은 서로가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도구일 수 있다. 다만, 그 경쟁심을 왜곡시키지 말자. 목표라는 결과를 경쟁이라는 과정보다 절대적으로 우선 시 할 때 경쟁심의 순수성은 왜곡되고 그 잠재력은 빛을 잃는다. 한번 경쟁심이 왜곡되어 규칙을 잃은 두 욕망이 끝없이 부딪힐 때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될 뿐이다.

5. 야심: 유명해지려는 욕망.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남이 바라봐 주는 주인공이 되는 욕망을 한 번쯤은 가질 터. 그러나,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야심을 품는 자체로 질타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야심을 위해 타인과 경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보다 나은 우리가 되기 위한 미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야심이 향하는 그 끝이,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해 있다면 그 과정 자체가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경우 야심이 향하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가 성공이라고 일컫는 그런 것들, 이를 테면, 돈과 명예, 권력 따위의 것들이다. 인생에서 돈과 명예, 권력을 거머쥐고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할까. 헤어릴 수 없이 많은 돈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간 어느 재벌과, 서울역에서 쓸쓸히 죽어간 어느 한 노인의 죽음 사이의 차이점은 뭘까. 그 둘의 인생 가운데 어느 인생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돈과 명예, 권력에 대한 야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할까. 그 돈과 명예, 권력이 야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목표가 되는 한, 우리의 삶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중독된 삶은 대체로 그러하니까.

6. 사랑: 서로를 통해 비로소 충만해지는 감정.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야심을 품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무슨 얘기일까. 치열한 경쟁을 통해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타인으로 부터 주목받기 위한, 그러니까 아이돌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군중(친구, 비즈니스 관계, 선후배 등)들로 부터 주목 받기 위한 욕망이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랑을 통해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은 나의 자아를 확장함으로써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의 자아를 넓혀 그 대상이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게 포옹하는 것이다. 군중과 내가 느슨한 관계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매우 강한 결합관계이다. 사랑의 감정이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이 강한 결합 관계에서 나온다. 믿음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로부터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 사람만은 내 옆에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단점 조차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은 나보다 더 '나'인 존재. 그래서 자아의 확장으로 결합된 두 영혼은 서로를 충만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7. 대담함: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
대담함은 우리로 하여금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게 하는 힘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우리를 설레게 한다. 대담함은 어쩌면 절박함에서 기인한다. 지금의 안정적인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정착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재의 안락한 일상을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고 의미를 잃어간다면, 미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자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그래서 대담함은 현재의 상태를 바꾸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다. 위험할 수도 있고, 고될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때. 궁지에 몰린 자의 생존본능이 두려운 마음의 상태를 대담함으로 바꾼다. 대담함을 무모함과는 구분하자. 무모함은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도전인 것에 비해, 대담함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니까.

8. 탐욕: 물질에 대한 중독. 
인류에게 소유의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어쩌면 탐욕의 개념이 없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이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 더 좋은 핸드백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갑'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성공'한 자들은 그렇게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들의 어깨는 늘 무겁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 물질을 축적하지만 많은 부가 곧 권력이라는 공식을 깨닫게 되면서 물질에 대한 욕망은 다른 차원으로 발전한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러움과 경탄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고 또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물질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안겨주고 경탄의 대상이 되게 하며 우리를 대담하게 하고 심지어는 이성의 사랑을 얻게도 한다. 하지만, 미안하다. 이 모든 게 착각이라서.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뒤에 있는 물질이니까. 그들은 사실은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그 물질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게 탐욕은 나의 주인공 자리를 물질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9. 반감: 과거의 우연적 슬픔의 원인이 현재의 어떤 사물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감정.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사물에 투영된다. 인간은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위해 오늘 방어기재라는 갑옷을 두르고 있다. 그 갑옷은 밖으로 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에서 분출되는 욕망도 차단한다. 반감은 그렇게 많은 상처가 겹겹이 쌓여 우리 영혼을 두르고 있는 갑옷인지도 모른다. 반감을 가지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는 점점 고립되어 간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감, 문신을 한 사람에 대한 반감, 귀걸이를 한 남자에 대한 반감, 지나치게 예쁜 여자/잘생긴 남자에 대한 반감, ... 이런 반감의 감정이 들 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왜 이 자를 싫어하는가 라는 질문'이 그에 대한 반감을 호감으로 바꾸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른다.

10. 박애: 상대방의 상태를 공감하고 그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감정.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적은 인간이다. 어제 환호했던 군중이 오늘 나에게 돌을 던진다. 인간이 인간을 배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애의 감정 저 밑바닥에는 측은지심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옛날, 어진 군주가 백성을 바라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극우보수주의자들, 광신도들, 일베인들, 각종 범죄자들.. 그들을 바라볼 때 분노보다 슬픔과 애처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박애의 감정일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든 박애의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박애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니까. 왜냐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빼고는 유일한 조건없는 사랑이니까. 그런 사랑, 나 같은 사람이 하기엔 너무 벅차다.

11. 연민: 상대방의 불행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감정.
연민의 감정은 연민의 주체가 연민의 대상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상황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들은 상대방의 불행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래서 그들을 위로한다. 연민은 종종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힘을 주어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한다. 왜냐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는 어쨌든 약이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연민이라는 감정은 기울기를 따라 흐른다. 나보다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민은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 내미는 위로의 손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한 모금을 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지진이나 해일피해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우리의 많고 적은 도움을 받은 그들이 다시 잘 일어서고나면, 그래서 더이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연민의 중심엔 인간이라는 연대의식이 자리한다. 이성에 대한 연민은 종종 사랑으로 발전한다. 연민의 기울기를 극복한 이들이 이제 수평적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12. 회한: 과거의 저지른 과오로 인한 오늘의 슬픔
살면서 누구나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리고 그런 잘못과 시행착오가 없었더라면 좀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슬퍼한다. 하지만, 슬퍼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왜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니까. 역사에 'if'를 다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 역사가 전진과 퇴보를 반복하며 변증법적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듯이, 우리의 잘못과 시행착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는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기 위한 전진과 후퇴의 과정이다. 

회한은 그러한 잘못과 시행착오가 극복되지 못하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감정이다. 회한을 가지며 다시는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여전히 내가 그 기억 안에 허우적 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회한으로 인한 깊은 슬픔에 너무 자주 오랫동안 빠져있는 사람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자학적 감정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회한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이 필요하다. 그 지나간 일들에 허허롭게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과거를 극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Red M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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