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7일 화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4)

감정은 서로 뒤섞인다. 때로는 서로 비슷한 감정들이, 때로는 서로 모순된 감정들이 서로 부딪힌다. 서로 얽혀있는 감정의 고리를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에 닿을 수 있다.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본질에 닿는 과정. 이것이 명상이고 성찰이 아닐까. 마음안에 쉼없이 흘러다니는 구름을 관찰하며, 그 구름 사이로 해가 비추는 찰나를 잡아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나를 발견한다.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마지막 포스팅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3주간의 사유의 시간이 즐거웠다. 앞으로 몇 년 아니 십 수년이 지난 후, 지금의 이 포스팅들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즐겁지 않을까.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서른 일곱번째 감정에서 마흔 여덟번째 감정까지:


37. 후회: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뒤늦은 반성.
우리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며 살아갈까. 후회라는 감정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한 슬픔이다. 그것은 다시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전제를 가진다. 과거의 잘못이 오늘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의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회한'이라면, 후회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에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리라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나약한 우리는 똑같이 잘못된 선택과 실수를 종종 반복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은 좋게 해석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것은 '적어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할 테니 말이다. 

동일한 잘못에 대한 반복된 후회는 우리를 무디게 한다. 반복된 후회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대신에 때때로 합리화의 길을 선택하게 한다. Why Not? 이라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그 실수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한다. 한 때 예민했던 우리의 도덕적 감성은 그렇게 나이가들 수록 무뎌져 가는 건지도 모른다. 후회의 감정을 발전적으로 풀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그런 삶을 살다가 먼지와 같은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38. 끌림: 관계의 시작.
모든 사랑은 끌림에서 시작한다. 끌림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홀로 완벽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다면,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부족하고 남는 부분을 합쳐 우리는 서로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완전하게 하고 삶을 좀 더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늘 기다린다. 그래서 끌림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바로 '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끌림은 끌림으로 끝나버리곤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매력이 나에게 충분히 지속가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섹시한 여자에게 우리는 끌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알고보니 명품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떨까? 키크고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훈남'에게 우리는 끌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혈질에 폭력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사랑이 대상의 총체적 이미지에 대한 감성적 반응이라면 끌림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래서 끌림의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군가에게 끌리고 있는 당신은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39. 치욕: 타인의 나를 향한 비난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슬픔
당신은 본인의 약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누군가가 그 약점을 건드려 당신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산다. 그 약점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과거의 어떤 사건일 수도 또는 배경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나의 약점을 공격당했을 때, 대부분의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어쨌거나 그들의 비난은 사실에 근거할 것이므로, 반박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라도 상대방을 제압하고 싶지만, 사회생활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다.

우리 안에 치욕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보자. 그리고 본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같은 약점 또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에게 당신이라면 뭐라고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치욕의 감정은 내 안에 치욕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치욕의 감정은 밖으로 향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감춰져 있는, 스스로 수치스럽다고 단정해 버린 그 뭔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 대상을 우리가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길 수 없는 감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신이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사실은 많은 사람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 다르지만, 비슷하기도 하니까.

40. : 맞서기 두려워 욕망을 포기하는 마음
과거에 겪었을 어떤 직접적인 경험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적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때때로 겁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 방어기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겁은 필요해 보인다. 경우에 따라 심지어 현명해 보이기 까지 하다. 길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 난투극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 안에 뛰어들어 그들을 말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폭락하는 주식을 바라보며 모든 투자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홀로 낮아진 가격에 대량의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 반드시 뛰어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겁은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이 보내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 겁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대상으로 하곤 한다. 우리의 본능이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여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도전에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다가오는 도전에 대한 겁이 많아진다. 반복된 실패가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자신감을 상실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우리는 포기한다. 존재하지 않는 귀신 때문에 우리는 겁에 질리기도 한다.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과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겁의 감정은 모름에서 시작한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는 왜 과거에 사람으로 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왜 도전에 실패했는지, 왜 사랑에 실패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겁을 극복하는 것은 자기를 앎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41. 확신: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상태
확신이라는 감정은 어떤 상태 또는 상황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가 명확해 질 때 생긴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나 이런저런 지식을 활용한다. 하지만 나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확신에 가득 차 뭔가를 했다하더라도, 그 결과는 종종 우리가 원하던 바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확신과 의심사이를 저울추 처럼 움직이며" 살아간다. 늘 갈등하고 고뇌하며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최대한 예측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내고자 하지만, 행동의 결과와 그 결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확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 확신조차도 어쩌면, 단지 내가 가진 협소한 경험들과 지식의 파편들로 짜맞춰진 정당화된 허구일 수도 있을 테니. 이것 저것 모두 따져가며 타이밍을 놓치기보다 가끔은 본능에 충실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본능에 따른 선택이 가급적 맞는 선택이었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충분한 고민을 통해 그 분야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42. 희망: 불확실한 기쁨.
희망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보다 그것으로 인해 설레이는 감정에 촛점을 맞춘다. 희망은 오늘 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긍정의 감정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감정에 맞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엔진이다. 나의 삶에 행복이 찾아올 확률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되는 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미래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니까.

희망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루하루의 삶이 만족스러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조차, 그러한 일상이 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들에겐, 언젠가 그들의 일상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쬘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희망하는 미래를 현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운다.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미래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고군분투 한다. 그래서 희망은 미래라는 보이지 않는 객체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또한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희망이라는 횃불을 들고 전방을 응시하며 한 발자욱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희망을 놓으면 길을 잃는다.

43. 오만: 자기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겸손'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춤으로써 타인에 의해 높여지는 것이라면, '오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 타인에 의해 낮춰지는 것이다. 오만한 사람은 타인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에 누군가가 토를 다는 것을 싫어하며, 단순한 의견 조차도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인생에서 실패한다. 오만한 그들은, 사실은 나약한 존재다. 자신의 나약함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자신감이 종종 타인으로부터 반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만함은 인간관계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정작 그 오만함으로 그들 가운데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고 느꼈을 때, 정작 자기 주위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44. 소심함: 두려움의 대상을 확대하여 바라보고 회피하는 것.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즈음 세상의 그림자를 바라본 적 있는가? 소심한 마음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게 길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당당하게 세상의 정면을 응시하기 보다, 저물어가는 해가 세상을 바라보듯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림자의 크기 만큼이나 과장되어 있다. 소심함은 그렇게 바깥세상의 두려움을 확대하여 마음안에 투영시킨다. '겁'이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면 '소심함'은 보이는 대상에 대한 확대된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확신 보다는 의심이 많다. 맞서기 보다는 회피하고, 잊기 보다는 기억한다. 그들은 늘 신중하기에, 돈키호테와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들의 인생에서 크나큰 승리감은 맛보지 못하리라. 

당신은 소심한가, 대담한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대담함과 위험에 대한 방어본능으로 부터 오는 소심함. 그 가운데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45. 쾌감: 몸과 마음이 상호작용하여 완전한 기쁨을 만드는 상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체적 쾌감. 그것은 아마도 수십만년을 이어온 인간의 본능이리라. 커다란 성취로부터 오는 정신적 쾌감. 인간이 그것으로 부터 의미를 찾기 시작한 역사는 육체적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쾌락을 하나로 조화롭게 구현할 수 있을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육체적 쾌감이 정신적 쾌감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그 둘이 동일한 컨텍스트에 있음을 의미한다.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은 그 어느 것이 가치우위에 있지 않을 만큼 모두 중요하다. 육체적 쾌감과 정신적 쾌감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늦은 밤 강남이나 압구정의 룸싸롱 거리를 둘러보자. 술취한 남성들을 유혹하는 네온사인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찌라시들, 그리고 삐끼들의 얘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자신들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봉사해 줄 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한 두시간의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군중들과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간에는 어떤 컨텍스트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이다. 육체적 쾌감과 정신적 쾌감사이의 연결고리가 깨져있는 모습들이다.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이 조화를 이루는 좋은 예는 뮤지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박자와 선율은 뮤지션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들의 몸은 음악이 만들어 내는 선율에 맞춰 흔들리고, 그들의 심장은 박자에 맞춰 박동한다. 뮤지션은 음악을 만든다. 하나의 곡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운다. 영감을 얻기 위해 그들은 몸부림 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에 다시 몸을 싣는다. 그들의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은 음악이라는 하나의 컨텍스트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우리는 이렇게 의미있는 컨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기 삶의 뮤지션이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쾌감을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약한 우리는 종종. 그 연결고리를 잊곤 한다.

46. 슬픔: 큰 행복과 작은 행복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
슬픔은 비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현재를 타인과 비교하거나 또는 행복했던 과거와 비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덜 행복한 현재의 나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위 '잘 나가는' 타인과 비교하는 것은 우리를 박탈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들이 이미 나보다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박탈감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현재가 대물림되어, 그들의 아이가 다시 한번 나의 아이를 압도할 것이라는 불운한 미래에 좌절한다. 

우리는 나보다 더 넓은 집에 사는 사람, 더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 더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 더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맘 속의 나는 설 곳을 잃어 마음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다. 나를 잃은 나는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교에서 오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자아'를 찾는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인이 나에게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나에게 원하는 삶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행복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말하는 그들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때, 우리가 비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7. 수치심: 타인에게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회적 관계에서 나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비난에 대해 두려워 하는 감정이 '치욕'이라면, 수치심은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의미한다. 그래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도덕적 양심에 거리끼는 어떤 행위를 스스로 하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것. 모두 어떤 면에서는 용기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 청문회를 보게된다. 청문회는 국가의 행정을 이끌어가기 위한 각 부처의 수장이 될 사람들을 평가하는 자리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취를 통해 이름을 얻었거나 또는 능력을 검증받았던 사람들이고 또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청문회를 통해 소위 사회적 명망가들인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해왔고 본인의 기득권을 어떻게 남용해왔는 지에 관한 민낯을 보게 된다. 그들의 민낯은 곧 그들을 명망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우리들의 민낯이기도 하다. 그들을 보며 종종 궁금해 지곤 한다. 미안하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하는 그들은 정말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지. 아니면 그것 조차 연기일지.

48. 복수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심은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자에게 똑같은 해악을 가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복수심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자 개인적 결단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 복수가 상처를 낫게 할 것이라고. 복수를 위한 여정에, 나는 심판관이자 집행자이기를 자처한다. 복수심은 나의 마음을 대상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채운다. 거기엔 도덕적 양심도, 수치심도, 두려움도 없다. 복수심의 대상은 내 안에서 하루에도 열두번 난도질 당하고 갈기갈기 조각내어 진다. 거기엔 '나'가 아닌 또 다른 '나'가 존재할 뿐이다. 

복수심의 끝은 자멸 뿐 이다. 내 마음안의 대상을 해체하는 과정은 곧 자아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해체된 자아가 흉물스러운 괴물로 다시 태어난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점을 잃은 나의 모습.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돌연변이에 가깝다. 이성과 감정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나의 복수심은 행동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행동의 끝은 곧 사회적 관계, 사회적 삶의 끝을 의미한다.



Red M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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