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7일 토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2)


이번 포스팅은 강신주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두 번째 글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 감정들 하나 하나가 내가 세상을 대하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과정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아직도 정리할 감정들이 많이 남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되짚어볼 생각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열세 번째 감정에서 스물 네번째 감정까지:

13.
 당황: 사물에 대한 믿음과 실제 모습 사이의 부조리로 어쩌지 못하는 감정.
때로는, 아니 어쩌면 자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실제의 그것과 다름을 목도한다. 그 대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타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재단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이런거고 저것은 저런거고. 살만큼 산 우리는 이제 첫 인상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살만큼 산 우리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알고 있다. 그런데... 착각이다. 나를 안다는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고, 그래서 남을 안다는 것은 더더욱 착각이다. 

당황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뜬다. 그 새로운 모습이 우리를 더 기쁘게 할 수도 더 실망스럽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은, 애초부터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존재였으니까.

14. 경멸: 대상에게 품고 있는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부정하게 되는 감정
대상에 대한 경멸은 그 대상에 대한 기대를 동반한다. 경멸의 감정은 그 대상이 마땅히 보여줘야 하는 당위적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될 때 생기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그가 처한 컨텍스트로 규정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자 선배, 후배이고, 남자, 여자이며 아빠이고 엄마이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도 그 컨텍스트에 포함된다. 이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 대한 당위적 기대를 만든다. 경멸의 감정은 그 기대감이 무너지고 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솟아난다. 경멸의 감정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경멸의 감정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비루하게 만들며 또한 주저앉은 인간을 회복하기 힘든 정신적 불구로 만든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경멸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도 상처를 준다. 경멸의 감정에 휩싸인 나와 그 대상인 상대방은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옆 사람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리는 것.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모두의 공멸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해 줄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헤어지자.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것 만큼이나, 문제를 어떻게 푸는 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15. 잔혹함: 대상에게 해악을 가하도록 스스로를 자극하는 감정
인간관계에서는 만나는 과정 만큼이나 헤어지는 과정도 중요하다. 어떻게 헤어지는 가에 따라,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는 가에 따라 다음에 올 만남이 좀 더 성숙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잔혹함은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하는 상대방을 애써 밀어내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혼자의 힘으로 상대방을 밀어낼 수 없을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하는 것. 나약한 우리는 그래서 잔혹해진다. 하지만 그 잔혹함의 칼날은 한바퀴를 돌아 결국은 자신을 베고 만다. 깊은 상처를 입고 떠나는 그와 그를 보고 연민을 느끼는 나. 다시는 이런 만남을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늘 원형 경기장의 같은 트랙을 따라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16. 욕망: 인간의 본질적 자아
인간의 욕망은 본능과는 다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본능'이라면, 욕망은 그 위에 자리한다. 부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섹스에 대한 욕망. 이러한 욕망들은 본능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그 자체로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탐욕'은 이러한 욕망들에 우리가 중독되는 것이다. 욕망은 때때로 사회적 가치와 충돌한다.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은 속물로 낙인 찍히고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속에 있을 때 욕망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한다. 그렇게 욕망은 언제 부턴가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결국 '욕망'이다. 우리가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모습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본능의 레벨로 끌어내리지 않고, 성취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취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욕망이 이성의 도움으로 균형을 잡을 때 우리는 내 안의 욕망에 좀 더 관대해 질 수 있지 않을까. 

17. 동경:  좋아하는 어떤 것을 내 안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욕망
나는 무엇을 동경하는가? 나의 유년시절? 낯선 외국땅에서의 낭만적인 삶? 멋진 이성과의 데이트? 동경의 대상은 어떤 구체적인 사물일 수도 또는 추상적인 관념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주는 행복감은 나의 마음을 따사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내가 가질 수 없는 대상이기에 슬픔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은 삶의 거친 파도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마음을 정박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다시 길을 떠나야 함을 전제로 하는 쉼이어야 한다. 영원히 뭔가를 동경하는 마음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이내 끝없는 슬픔과 자괴감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경은 반드시 슬픔이나 자괴감으로만 귀결될까? 
앞으로 10년 후에 당신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서 있고 싶은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경해 보면 어떨까? 화가나 작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낸 자신의 모습을 동경해 보면 어떨까?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커리어 맨/우먼은 또 어떨까? 과거나 어떤 사람에 대한 동경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꿈을 향한 미래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우리를 설레게 할 수 도 있다. 

18. 멸시: 나를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을 과소평가 하는 것.
경멸이 상대방을 향한 당위적 기대감에 대한 배반감 같은 것이라면, 멸시의 감정은 상대방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엄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치가 돈과 권력에 의해  평가되버리고 마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의 존엄조차 그가 가진 물질에 의해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없고 빽없는 이들이 가진 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 처럼 되었다. 정장에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와 헐렁이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들어갈 때,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BMW 같은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과 경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서울 한 쪽 구석의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동등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부인할 지는 몰라도,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도 이미 그와 같은 속물근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옷이나 가방에 가격을 매기듯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몸값을 매긴다. 그렇게 몸값 높은 우리가 몸값 낮은 상대방을 멸시한다. 멸시의 감정은 그렇게 마음의 중심을 다른 그 무엇에 장악 당했을 때 생긴다. 사람의 존엄을 빼앗는 것. 마음의 중심을 빼앗기는 것은 탐욕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내려놓을 수록 행복하다.

19. 절망: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지고 막연한 공포가 현실이 되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 하루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가슴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처음엔 아닐 거야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루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행여 전화 통화라도 하게 되면 애써 아무일 없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어두운 마음을 감춰본다. 결국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조차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실낱 같았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절망을 경험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직장을 잃고 아무곳도 갈 곳이 없을 때,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때...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다시 날아오르는 경험을 할까.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다시 직장을 구했을 때, 땀흘려 열심히 일 해 차근 차근 모든 빚을 갚았을 때...

절망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비탄에 빠지게 하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하지만, 그래서 절망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또한 살아있게 한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없음을 막연하게 믿고 사는 존재. 내려가지 않으면 올라갈 곳도 없지 않은가. 

20. 음주욕: 술에 대한 지나친 사랑
음주는 즐겁다. 술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취하는 것은 즐겁다. 술 때문이 아니다. 취중진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을 통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춤과 노래로 채우며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더한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음주가 즐겁지 않다. 더 이상 그 안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나 대신 술이 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고 있다. 술 잔에 나를 담지 않으니, 취중진담도 없다. 나를 잃은 술잔은 가슴 속에 깊은 감정의 골짜기를 만든다. 혼자만의 감정에 취하며 우리는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세상을 한탄하며, 나의 지금을 한탄하며,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비루함을 저주한다. 그리고, 다시 그 감정에 취하고 감정을 소모한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21. 과대평가: 대상을 정상적인 것 이상으로 바라보는 것.
누군가를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 누군가는 당신이 가슴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당신이 존경할 만 한 멘토일 수도, 아니면 단순히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함께 알고 지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과대평가하는 것 또는 과대평가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대상이 내가 욕망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평가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그 하나 하나가 유일한 개체이므로 비교대상이 없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으니 애초에 평가도 불가능하다. 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다른 이의 시각에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과대평가는 결국, 그 사람을 향한 좋은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 사람을 꼭대기에 올려놓았으니, 이제 내려오는 길만 남았다.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 그 사람을 통해 목도하게 될 실망감을. 이런 감정이란 참으로 부질없지 않은가.

22. 호의: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감정.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길을 걷다가 앞선 사람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 도움을 주는 것. 호의를 보이는 것은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호의의 감정은 내가 당신의 편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스쳤을 수 많은 사람들.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를 호의라는 감정은 만들어준다. 내가 사실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 처럼 상대방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 호의라는 감정은 그런 존중의 표현이다. 호의를 통해 우리가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은 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을 위선의 가면 그 가장 겉에 드러나있는 선한 얼굴인지도 모른다. 나의 가장 추한 모습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관계가 진전되기 전까지 그에게 각인 시키고 싶은 나의 이미지이다. 그렇게 가장 선한 얼굴로 우리는 서로 간의 벽을 허문다. 

23. 환희: 기대했던 이상의 결과에 대해 느끼는 감정
당신은 어떤 기대를 안고 사는가? 애인에게, 오랜 친구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환희의 감정은 기대감에 반비례한다. 환희의 감정은 종종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부터 찾아온다. 나의 생일 인지도 몰랐는데 생일 선물을 받게 되었다거나, 퇴근길에 별 기대없이 구입했던 복권이 당첨되었다거나 하는 등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 그리 자주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환희의 감정이란 오랜 도전 끝에 마침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것이 아닐까. 등반가들이 정상에 섰을 때 느낄 짧은 환희를 맛보기 위해 그렇게도 오랜시간 산을 타는 것 처럼, 아이돌들이 무대에 서는 환희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무대 뒤에서 땀을 흘리는 것 처럼, 우리 삶도 어쩌면 그런 짧은 환희의 순간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새 '예측 가능한 환희'에 익숙해 져 있다. 

그러나 본래 환희의 감정이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어둠으로 부터 솟아오르는 따사로운 빛과도 같은 것이다. 환희의 감정에 친숙한 사람의 마음은 시인의 마음과도 같다. 봄에 피는 꽃과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를 노래하는 사람들. 자연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에 조차 반응하는 그들의 감수성.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감수성을 가지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고되지 않은가. 사람에게 감동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 대한 기대를 낮추며 살고 있다. 환희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고 있다. 내 갈 길이 바빠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두려우니까. 인간에게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부질없는 '동경'이 아닐까.

24. 영광: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는 존경에 대해 가지게 되는 기쁨.
영광은 주인공이 된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영광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주인공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경쟁을 통해 마침내 얻은 자 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광은 자기 만족의 감정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봐 줌으로써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영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나의 존재를 타인의 가슴에 새기게 한다는 것. 나에 대한 기억을 타인의 뇌리에 남게 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남길 수 최고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역사에 아로새겨 지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여하간 우리는 그렇게 이름을 남기는 데에 집착하곤 한다. 인간에게 가치있는 삶이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가슴에 남는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관계를 타고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태어나면서 시작된 우리의 관계 그물망은 팽창과 축소를 거듭하며 죽을 때 까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영광의 순간은 그 관계 그물망에서 우리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임을 예고한다. 사람들의 가운데 우뚝 서 고자 하는 욕망. 영광의 감정은 그 욕망이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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