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1일 수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3)

평소에는 그저 지나쳐 갔을 내 안의 감정의 흐름들이 요즘들어 색다르게 다가온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이면을 들여다 보려고 하고, 그 감정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를 사유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참으로 단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해 새삼 눈을 뜨게되는 시간들이다. 그러고보니,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 만큼이나 사람의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도 참 재미있어 보인다. 이번 포스팅은 강신주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세번째 포스팅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스물다섯번째 감정에서 서른 여섯번째 감정까지:

25. 감사: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 대한 마음의 표현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부터 우리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장터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포용하는 법 보다는 아수라 같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각종 비법과 노하우에 귀를 기울인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금새 뒤쳐지는 세상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의 무표정 이면에는 하루 하루를 헤쳐나가기 위한 고민들이 묻어 난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세상엔 누군가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쓴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귀중한 마음을 할애해 줬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은  상대방의 마음 써 줌에 대해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냉대와 개인주의, 경쟁으로 폭발직전인 우리를 진정시킨다. 치열한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는 방식이 아니고서도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마음을 열어보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인식될 수 있고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로, 이성친구로, 아빠 엄마로, 선생님으로, 동료와 선후배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만으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주인공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 있는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가 있어 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26. 겸손: 나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현
겸손은 실제보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다. 그래서 실제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겸손할 수 없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더 낮출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부, 명예,권력 또는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외피론적 허무함을 깨닫고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무대에서 청중들을 휘어잡던 가수가 객석으로 내려왔을 때 청중들의 반응을 본 적이 있는가? 무대에서 늘 바라봄의 대상이었던 그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어 이제는 만질 수 있고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욱 열광한다. 겸손은 그런 것이다. 나를 낮추어 상대방과의 벽을 허무는 것.  겸손은 스스로를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겸손은 그 주인공을 더욱 위대하게 한다. 

하지만, 주의하자. 겸손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이 약해보일 때를 기다렸다가 밟고 올라서려는 무리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룹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잡은 약점도 결코 놓지 않는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할 수 있으려면 어떠한 이유로든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자.

27. 분노: 자존감에 해악을 끼치는 대상에 대한 미움.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 있는 대상에 대해 강한 연대감을 가진다. 연대감은 나약한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이가 핍박을 받고 존엄을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부당함이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는, 농민은, 철거민은, 노점상은 또 다른 인간의 그룹인 자본가에 대항한다. 군사독재와 민주 세력이 충돌하고 진보와 보수가 충돌한다. 약자는 정치세력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강자는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약소국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강대국을 보며 분노하고, 시민들이 부여한 권력을 남용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부패한 정치인을 보며 분노한다. 우리는 철거용역 깡패들을 수수방관하는 경찰들에 분노하고, 남북대치와 같은 국가적 긴장감을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세력에 분노한다. 분노는 우리가 약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99%의 감정이다. 99%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고 99%의 시민이 역사를 움직인다. 분노의 감정은 세상을 바꿀 만큼 강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존감이 짓밟혔을 땐 언제든 분노하자. 분노의 감정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28. 질투: 타인의 행복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짐을 느낄 때 가지는 감정.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어떤 대상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그 대상은 부나 명예, 권력과 같은 물질것을 소유한 사람일 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보일 때와 같은 것 일 수도 있다. 질투는 관계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유발한다는 면에서 부러움과 구별된다. 부러움은 부러움의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도록 나를 충동질하고 동기를 유발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질투는 동기부여 보다 박탈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다.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질투를 느끼게 행동을 하는 것은 긴장감을 유지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간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지금은 내 옆에 있지만 그 사람이 언제든 내게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불안감.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마음의 평화를 얻어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불안한 상태가 이어진다면, 굳이 왜 만나야 할까. 이성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로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성관계가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면 그 질투의 대상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 그 대상이 나보다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물질적 배경이라면 질투심은 본인의 자신감 결여에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가진 그 무엇을 당신은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자괴감인 것이다. 사실은 그 이전에 당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그의 외피를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교하지 말자. 관점을 바꾸자. 상대방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부러워 해 주자. 그래야 당신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29. 적의: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도록 자극하는 감정.
적의 또는 적개심을 가지는 것은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적의를 가진다는 것은 대상과 내가 더 이상 타협점에 이를 수 없거나 그럴 마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적개심의 대상에게 우리는 물리적, 정신적 타격을 가한다. 이러한 해악은 소위 '소심한 복수'에서부터 정치적 음해까지 그 경우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사람에게 쉽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주의하라. 직장에서 뛰어난 후배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사람, 종종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상에게 물리적, 정신적 해악을 습관처럼 가하는 사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보다 물리적 해결책을 더 선호하는 사람. 마음속의 적의를 합리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휘두르는 칼이 누구를 향하고 있고 누구에게 상처를 줄 지를 걱정하기보다는 본인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를 잠재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있으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를 변화시켜 함께 살거나, 아니면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아 죽거나. 

30. 조롱: 대상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이려는 감정.
대상을 조롱하는 감정은 그 대상보다 자신이 더 높이 있다는 우월감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자의 마음은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강제함으로써 시기와 질투심을 극복하려 한다. 그리고 그 우월함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대상을 조롱하고, 조롱받는 대상이 침묵하거나 얼굴이 벌개져 고개를 숙일 때 만족을 느낀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사람은 그래서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실력 없는 상사이거나, 학교같은 곳에서는 찌질한 무리의 골목대장 쯤 될 것이다.  그들의 내면은 매우 나약하고 비겁하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사람들 앞에서는 비굴하리만치 무릅을 꿇고, 자신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영어를 유난히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 백인앞에서는 몸을 베베꼬며 실없는 눈 웃음을 보내고 무한한 친절을 베푸는 어떤 이들이 동남아시아인이나 중동인들에게는 눈을 내리깔며 무표정한 것을 목격한다. 인종 차별이라는사회적 지탄을 피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들을 조롱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본인들이 속한 한국인의 몸값이 백인보다는 낮고 동남아인들 보다는 우월하다는 감정에 지배당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모국어가 영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고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하는 백인 중 상당수가 사실 모국에서는 무직자이거나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떠돌며 이런 저런 잡일들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한국에서 대우도 못받고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낮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어떤 동남아인들은 모국에서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망명 신청을 해 온 최고급 지식인들이라는 것을.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그룹이 나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내가 정말 내가 속한 그룹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31. 욕정: 성교에 대한 욕망
섹스는 두 남녀가 소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섹스가 대화와 구별되는 것은, 의미있는 섹스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화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합치는 것이라면, 섹스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몸을 합치는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모두 합쳐질 때 보다 완성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대화를 통해 섹스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되고, 섹스는 대화의 깊이를 더한다. 대화와 섹스는 그렇게 선순환한다. 이런 이유로,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는 서로간의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적 교감이 없는 육체적 관계는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육체적 관계가 없는 정신적 교감은 감정적 유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원 나잇 스탠드를 위해 이성을 찾는 사냥꾼들. 그리고 그들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들. 그들간에 사랑이 싹 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섹스를 육체적 쾌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서로를 사실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이들과 쾌락을 댓가로 몸을 던지는 그들 중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32. 탐식: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 욕망.
산해진미가 품고 있는 맛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탐식은 그 즐거움에 대한 욕심이 과하여 품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젊은 시절 수양했던 Zen불교의 영향을 받아 금식을 생활화했다고 한다. 정신을 항상 맑게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수도승들은 맛의 즐거움을 멀리하기 위해 매운 것, 짠 것, 단 것등을 멀리한다고 한다. 육체의 즐거움을 멀리함으로써 신께 좀 더 가까워 지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들이 그렇게 수도승처럼 살 필요야 없겠지만 가끔은 그렇게 육체적 즐거움을 멀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운이 좋다면 육체적 즐거움 보다 더 좋은 뭔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탕이 가득 들어 있는, 입구가 좁은 유리병에 손을 넣고 양껏 집었을 때 손을 뺄 수 없는 것 처럼, 가끔은 마음을 내려 놓아야 이루어질 때가 있지 않을까. 

33. 두려움: 과거의 슬픔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감정.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자와 점쟁이에 의존하고, 종교에 심취한다. 불확실성은 인간에겐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미래를 비관하고 성공을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미래를 낙관한다.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미래에 투영시키는 방식이다. 미래가 두렵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가 설레인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데 실은, 이 설레임과 두려움 모두 내 안의 감정이 만들어 내는 허상이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이다. 

그러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에겐 연습이 필요하다. 이기는 연습. 전투에서 이겨본 사람만이 이기는 게 뭔지를 알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이기는 연습이다. 성취감을 맛보고 작은 열매를 따는 즐거움을 아는 연습이다. 이기는 것도 습관, 지는 것도 습관이므로 우리는 이기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일주일에 두 번 운동하기, 하루에 한 꼭지씩 영어 신문 보기, 일요일 아침 일찍 시작하기, 술은 한 달에 한 번만 등. 본인의 낡은 습관을 관찰하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낡음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느새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관념이 만들어내는 실체없는 공포임을 명심하자.

34. 동정: 자기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불행을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는 느낌.
우리는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려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관심사, 비슷한 나이또래, 같은 학교와 고향.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조금 더 잘 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정의 감정은 그러한 연대감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연대감을 가지는 대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에게 향하는 감정이 '분노'라면, 동정의 감정은 그 해악을 당한 자에게로 향하는 감정이다. 동정의 감정은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 한다는 측면에서 '연민'과는 구별된다. 최근 어느 대기업에서 수천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했을 때,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던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들은 아마도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 자기 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치지 말란 법이 없을 테니 말이다. 동정심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일깨우기도 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의 슬픔을 공감하며 한편으로는 나의 처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슬픔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중 누군가는 또 하나의 방어기재를 몸에 두르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동정심은 슬픔을 통해 연대감을 확인하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나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35. 공손: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마음.
공손함에는 두가지가 있다. 참 공손함과 거짓 공손함이다. 참 공손함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마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세를 낮춰 겸손할 줄 알는 사람은 그 겸손함이 몸을 통해 베어 나온다. 거짓 공손함은 그가 가진 위선의 일부에 다름 아니다. 거짓 공손함은 인간에 대한 예의 보다는 나보다 누가 더 권력이 있는 가에 따라 표현된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윗사람에게 대하는 모습과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진짜 공손함인지 거짓 공손함인지 알 수 있다. 이해 관계에 따라 대상에게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는 부류의 사람들을 조심하자. 언제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손함은 우리가 같은 편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공손함은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그 자리에 신뢰를 쌓는다. 공손한 이들은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늘 먼저 자세를 낮추기 때문이다. 다만, 공손함과 복종심을 구분하자. 공손함은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할 때 조차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인 반면, 복종심은 상대방의 의견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나보다 더 높은 자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36. 미움: 내안에 또 다른 나.
미움의 감정은 미움의 대상이 내 맘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자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미움의 대상은 시시때때로 마음을 혼란케 하고 평정심을 잃게 한다. 미움의 감정이 자주 되살아 날 수록 대상은 내 맘안에 점점 더 강하게 자리잡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속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파괴한다. 그렇게 우리는 미움의 대상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속에 미움의 대상을 고착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나 아닌 그 누구도 내 마음속에 그런 존재를 넣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 미움의 대상을 쉽사리 꺼내 놓을 수도 없다. 꺼내려 할 수록 그 대상은 내 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고 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에 대한 감정은 미움을 넘어 증오로 진화한다. 

당신의 마음속에 미움의 대상이 있는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잠을 설치게 하는 자가 있는가. 행여 그를 용서하려 노력하지 마라. 용서하려 할 수록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를 마음속에서 꺼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중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일일 수도 있고, 공부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다보면 마음속에서 그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이러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잊는 법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법이 닮아 있다는 것이.


Red Mouse

댓글 없음:

댓글 쓰기